세계 2차 대전 역사상 최고의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의 삶과 명언들 그리고 나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이야기
여기 평범한 문학 박사였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어쩌다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고 언론을 조작해 독일 국민을 2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었을까요.
20세기 언론학 연구 대상까지 돼버린 악마의 선동가 요제프 괴벨스가 역사를 바꾼 흔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897년생 요제프 괴벨스 그가 태어난 세대는 20세기 최악의 세대였습니다.
17세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32세에는 세계 대공황이 42세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으니까요.
목차
1. 괴벨스의 초년기
2. 괴벨스의 본격적인 선동 이야기
3. 괴벨스와 히틀러
4. 괴벨스와 유대인 학살
5. 괴벨스의 몰락
6. 괴벨스 명언들
1. 괴벨스의 초년기
네 살 무렵에 발이 골프채처럼 휘어지는 망곡족이 되어 순탄치 못한 성장기를 보내야 했던 괴벨스는 신체적 장애를 공부로 해소했습니다.
공부의 재능을 보였던 청년 괴벨스는 1921년에 문학박사 학위도 받았는데요.
안타깝게도 현실은 시궁창이었습니다. 1920년대 독일은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독일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괴벨스가 나고 자란 제국은 붕괴하고 이제 나라는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사라진 나라에서 권력은 자꾸 분산됐고 선거로 뽑아놓은 지도자들은 툭하면 바뀌었죠. 지금 독일 국민에게 민주주의가 가당키나 한가 그가 자연스레 민주주의의 회의감을 가지게 된 과정입니다. 게다가 독일이 감당할 수 없었던 막대한 전쟁 배상금 330억 달러의 여파로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이 덮쳤습니다. 2년 동안 물가가 10억 배나 치솟았으니 화폐 가치는 시간 단위로 떨어졌죠.
거리에는 실업자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희망이 없는 나라 계속되는 취업 실패 그의 분노는 국가와 자본주의 유대인에게 향했습니다.
금융 자본가와 이들을 뒤에서 쥐락펴락하는 유대인이 고귀한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다고 믿었죠.
난세에는 흔히 영웅을 꿈꾸잖아요. 취업난에 질려버린 괴벨스에게도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1923년 뮌헨의 맥주홀에서 폭동을 일으킨 히틀러가 법정에서 신들린 연설을 퍼부었을 때 괴벨스는 그에게 운명을 걸기로 결정했죠. 괴벨스는 1925년 2월 북 독일 나치 당에 입당했는데요.
당시 나치당은 극우와 극좌 이념이 뒤섞인 잡탕이었습니다. 괴벨스는 이때까지만 해도 당내 좌파 세력에 불과했죠. 1926년 4월 8일 히틀러가 괴벨스를 뮌헨으로 초청한 날 두 사람의 진한 서사가 시작되고 말았습니다.
괴벨스는 맥주홀에서 2시간 동안 연설을 펼쳤는데요. 히틀러는 괴벨스가 아주 마음에 쏙 들었던 겁니다.
그렇게 괴벨스는 큰 물에서 놀기 시작했죠. 괴벨스는 보수 세력에 접근하는 히틀러를 따라가며 결국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까지 벗어던졌습니다.
2. 괴벨스의 본격적인 선동 이야기
괴벨스의 본격 선동 전략은 베를린에서 첫 선을 보였습니다.
당시 베를린은 볼셰비키 공산당의 핵심 근거지였고 나치는 그야말로 듣보잡이였는데요. 괴벨스가 세상에 나치를 알리기 위해 뭘 했을까요. 그는 나치 돌격대를 동원해서 대규모 정치 시위를 벌였습니다.
새빨간 문구로 공산당을 도발하니 예상대로 피 튀기는 유혈 사태가 한바탕 벌어졌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떡밥을 제대로 던진 겁니다. 괴벨스와 돌격 대원들은 하켄크로이츠 군기를 펄럭이면서 군중에게 호소했습니다.
신문은 떠들썩하게 사건을 보도했고 나치는 유명해졌습니다. 괴벨스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대중의 눈에 띄려 했습니다. 그는 거리를 정복하는 자가 대중을 정복하고 대중을 정복하는 자가 국가를 정복한다고 했죠.
이때 이성이 아닌 감성을 지배하는 것이 중요 포인트였습니다.
괴벨스의 선동 전략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입맛에 맞는 특정 주제를 단순화한다
둘째 반복 주입한다 셋째 대중의 부정적 감정을 확대한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은 나치에게 좋은 기회였습니다.
1932년이 되자 독일 실업자는 600만 명에 육박했죠.
대중의 혼란과 절망 공포 모든 부정적 감정을 게벨스는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선전의 핵심은 무엇을 적으로 만드느냐에 있었는데요. 베베스가 콕 찍은 적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였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모든 계급을 하나로 통합하려면 공공의 적이 필요한데 거기에 유대인이 제격이었던 겁니다.
노동자들은 경제를 주무르는 유대인 자본가를 증오했고 우익 세력은 유대인 혁명가를 두려워했습니다.
다른 민족을 좀 먹고 산다며 유대인을 배척하는 대중의 그 뿌리 깊은 감정을 게베스가 반복해서 쭉쭉 끌어올렸죠.
그런데 이런 반유대주의 인종주의는 내부를 통합하기엔 딱 좋았지만 사실상 서방 국가들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 가지 서방국가의 적인 공산주의도 적으로 규정한 거였죠.
우리 독일이 동유럽에서 퍼지는 공산주의를 이렇게 딱 차단해 주고 있지 않냐 하고 내세울 수 있으니까요.
3. 괴벨스와 히틀러
1932년에 괴벨스는 히틀러를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두 팔을 걷어붙입니다.
그런데 경쟁 상대가 워낙 막강해서 사실 게임이 될 것 같지는 않았죠.
힌덴부르크는 1차 대전을 진두지휘하던 참모총장 출신이고 히틀러는 예비역 상병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괴벨스는 히틀러를 위해 화려한 연출을 선보였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구원자 이미지를 만들고 웅장한 북소리와 군사 행진으로 히틀러의 등장을 극대화했으며 대도시 한복판에서 히틀러 영화를 열심히 상영했습니다.
이 선거에서 결국 힌덴부르크가 당선됐지만 히틀러는 전국적인 인지도를 확보한 정치인으로 입지를 굳히게 됐죠.
1933년 1월 히틀러는 총리로 임명됐고 두 달 뒤 게벨스는 국민 계몽선전부 장관으로 임명됐습니다.
이게 36살 때의 일인데요. 10년 전만 해도 세상에 불만 많던 취준생에게 엄청난 출세길이 열린 것입니다.
언론은 곧장 괴벨스의 소나귀에 넘어갔고 그는 선전을 체계적 시스템으로 만들었습니다.
괴벨스는 당대의 최첨단 뉴미디어인 라디오를 특히 중시했는데요.
빈부에 상관없이 전 국민을 구석구석 세뇌하기 위해선 저렴한 라디오를 보급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렇게 나온 게 일명 국민수신기라고 이름 붙인 라디오였는데요.
76마르크였다가 정부 보조금을 지급해서 35 마르크까지 가격을 낮췄습니다.
국민 수신기는 유럽에서 가장 저렴한 라디오로 70% 이상의 독일 가정으로 보급됐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보급률이었죠.
훗날 이 라디오는 괴벨스의 입이라고도 불리게 됩니다.
전 국민은 이 라디오로 나치당의 사상 히틀러의 업적 같은 것들을 매일같이 들어야 했습니다.
외국 방송은 들을 수 없었고요 그리고 게베스는 갓 탄생한 라디오보다도 생소했던 tv까지 적극 활용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세계 최초로 tv 생방송이 실시됐는데요. 이때 관중들은 선수단을 향해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었죠. 20세기 미디어 매체를 창의적으로 활용해서 여론을 움직인 괴벨스는 훗날 수많은 학자의 연구 대상이 될 만했습니다. 괴벨스는 영화 산업까지 쥐락펴락하며 배우까지 관리했는데요.
국민이 즐기는 오락물 속에 선전 내용이 은근하게 녹아 있을 때 그 효과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1934년에 독일 전역에서 진행된 투표는 역사를 바꿨습니다. 히틀러에게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을 다 몰아주자는 투표였죠. 결과는 압도적인 찬성 히틀러는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마침내 절대 권력을 가진 총통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괴벨스가 인생을 건 꿈이 드디어 실현된 순간이었죠. 히틀러의 광기는 제2차 세계대전을 향하고 있었고 괴벨스는 선전 선동으로 그 앞길을 터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승패가 선전에 달렸다고 생각했는데요.
실제로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절대적 복종과 광기를 목격한 미국은 전쟁 이후 나치의 프로파간다를 전격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괴벨스는 침략을 정당화하고 대중을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괴벨스가 말하길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 했습니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 지역을 합병하려 할 때는 독일계 주민들이 학대받는 내용을 자극적으로 보도하라고 지시해서 국민을 격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쯤에는 국방군 최초로 선전 중대가 설치됐는데요.
선전 중대의 촬영보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이동극장에서 방영이 됐죠.
1939년 9월 폴란드 수도를 공격했을 때까지도 독일 국민들은 전쟁이라는 표현을 듣지 못했습니다.
독일 언론은 반격이라고 설명했죠. 국내 방송을 통제하던 베벨 스는 외국 방송을 듣거나 유포하면 징역형이라며 엄포를 넣습니다.
4. 괴벨스와 유대인 학살
그는 심지어 적군의 심리까지 흔들어 댔죠 일본군이 진주만에 미국 태평양 함대를 치면서 2차 세계대전의 무대가 더 확대될 무렵 독일에 있던 괴벨스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대중이 전쟁에 열광하도록 선전하는 일 외에도 유대인 학살을 위한 선전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 6군데 중 가장 악명 높은 곳은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인데 수많은 유대인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끔찍한 고문과 집단 학살을 당한 걸로 유명하죠. 소련과 싸우던 동부 전선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습니다. 1943년 2월 3일 독일군이 스탈링 그라드에서 패배하자 괴벨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성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2월 18일 베를린에서 괴벨스는 그 유명한 총력전 연설을 펼칩니다.
우리 모두가 독일의 승리를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고 요구했죠.
이날 베를린 스포츠 공전에 모인 1만 5천 명의 청중에는 나치당뿐만 아니라 배우도 섞여 있었는데요.
모두들 훈련받은 대로 뜨거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현장은 생생하게 중계됐고 전방의 군인들과 수백만 독일인에게 큰 영향을 줬습니다.
5. 괴벨스의 몰락
그러나 그해 8월쯤부터 괴벨스는 독일의 패망을 두려워하며 책상에 권총을 넣어놓기 시작했다고 전해지죠
1944년 6월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고 괴벨스의 선전은 점점 효과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7월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있고 나서 괴벨스는 총력전 정권 위원으로 임명됐는데요.
게벨스는 또다시 총력전을 외치면서 국민 돌격대를 조직하고 16세에서 60세의 모든 남성을 전장으로 보냈습니다. 사실상 이미 전쟁에 동원할 만한 청년들은 전부 동원된 상태였으니
10대 청소년이든 5060대든 총 쏠 수 있는 눈과 팔만 달렸으면 죄다 소집한 겁니다.
무너지던 나치 독일이 택한 최후의 바라기였죠. 1945년 4월 16일에는 소비에트 연방과 나치 독일의 마지막 전투 베를린 공방전이 시작됐습니다. 노인과 여성 청소년에 이르는 국민까지 군복과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총알바지로 내몰렸으니 독일군의 전투력은 소련군보다 한참 떨어졌습니다.
베를린에서 포위된 히틀러를 보며 절망에 빠진 지도부 내부에서도 급격히 분열이 일어났는데요.
예를 들어 유대인 대학살의 최고 책임자였던 하인위이 힘러는 히틀러 몰래 연합국에 항복하려다가 반역자로 찍히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충실한 괴벨스는 끝까지 히틀러에게 등돌리지 않았죠.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하면서 괴벨스를 총리로 지명했습니다.
자신의 영웅이 죽고 괴벨스는 소련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미 총통 관저까지 밀고 들어온 소련군은 전면적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세계를 지옥으로 만드는 데 한몫 제대로 한 괴벨스 그의 최후는 무책임했습니다.
5월 1일 자녀들을 독약으로 모두 죽인 괴벨스는 부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은 절대 권력에 빠지기 쉬워집니다.
나치 독일의 파시즘 역시 1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사회적 불안이 극으로 치달았을 때 나타났는데요.
그 반동으로 강력한 중앙정부의 완벽한 통제와 국가의 안정을 원하는 대중에게 히틀러는 그야말로 구원자였습니다. 민주주의보다 독재 정치를 주장하는 파시즘은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독재 정치를 대놓고 강조하는 근대의 대체 종교와도 같았죠.
6. 괴벨스 명언들
1.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2. "대중은 여자와 같아 자신을 지배해 줄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3.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4. "99%거짓과 1%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5. "열린 마음은 문지기가 없는 성과 같다."
6. "언론은 정부의 손안에 있는 피아노가 돼야 한다."
7.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8. "대중에게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생각이라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9.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10. "국민들에게 무조건 불쾌한 뉴스를 숨기는 것은 심각한 실수이다. 적당한 낙관주의를 기본 태도로 삼아야 하지만, 모든 부문에서 좀 더 현실적으로 변해야 한다. 국민들은 이를 능히 소화해 낼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
11. "피에 굶주리고 복수에 목마른 적에 맞서려면 무엇보다 한없는 증오를 활용해야 한다."
12. "위기를 성공으로 이끄는 선전이야말로 진정한 정치 예술이다."
13. "선전가는 국민의 흔들리는 영혼을 이해하는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14. "선전은 창조와 생산적 상상력에 관련된 문제이다."
15. "정치란 불가능의 기적을 일구어내는 것이다."
16. "우리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아니면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17.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국민들에게 낙관적 전망을 심어줘야 한다. 그래서 긴장을 해소하고 유쾌함을 주는 오락 영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영화야말로 일급의 민족 교육 수단인 만큼, 모든 영화는 면밀히 구성되고 조직되어야 한다."
18. 영화 몰락에도 나온 "우리는 국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어.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지.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는 거야."
19. 선동은 단 한 문장으로도 가능 하지만 그것을 해명하고 증명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밝혀 냈을 때 이미 대중은 선동되어 있는 상태다.
그리고 히틀러를 열렬히 추종했던 천재적인 정치 연출가 괴벨스 그가 수많은 인간을 통제했던 선전은 앞으로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지배자들의 도구입니다.
어떤 국가의 어떤 정부든 대중의 지지로 성패가 갈리기 때문입니다.
쏟아지는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대 여론 조작으로 대중을 통제한 괴벨스는 우리에게 훌륭한 교재가 되어 줍니다.
대중을 선동하는 법을 배우자는 게 아니라 그 악마의 재능으로 어떤 파멸에 치달았는지를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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